
독자분들께서는 짝사랑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? 전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누군가를 좋아하기보다는 마음속에 꼭꼭 눌러서 제 감정을 부정하곤 합니다. 그래서 저처럼 소극적인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며 글을 써봤습니다.
넌 여름밤에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을 좋아한다. 바다보다는 산을, 짜장면보다는 짬뽕을, 해외여행보다는 국내를 선호한다. 난 네가 좋아하는 모든 걸 다 꿰고 있다. 단 하나,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만 빼고. 오랜 시간을 들여 추리하고 짐작했으나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.
내가 널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. 널 사랑하고, 정말 좋아했다면 더 다가가야만 한다. 드라마 속 능청스럽고 다정한, 잘생긴 남자 주인공처럼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놓으려 했을 것이다. 단지 거절당하기 싫다는 찌질한 생각 때문에 다가가지도 못한다면 널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다. 하지만 어느 날은 내 머릿속이 온통 너로 차올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. 네가 ‘오늘 옷 좀 예쁜데?’라고 스치며 했던 말은 친구와의 싸움으로 망칠 뻔했던 하루를 최고의 날로 만들었다. 남의 성공에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기뻐해 본 적 없는 내가, 너의 작은 성과에는 뛸 듯이 신이 난다.
역시 난 널 좋아하고 있다. 널 너무 사랑하기에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. 난 네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길쭉한 다리도, 화려한 언변도, 모두를 홀리는 멋진 얼굴도 가지고 있지 않다. 그렇기에 친구로라도 지내며 어떻게든 거머리처럼 붙어 있고 싶은 것이다. 연인이 된다면, 무엇이든 줄 수 있을 만큼 행복할 테지만 거절당하면 다시는 널 보지 못하기에, 다시는 같은 온도로 함께할 수 없기에 엄두도 낼 수 없다.
내게 눈치 빠른 사람이라고 그리 자랑해 대더니, 넌 정말 둔한 사람이다. 늘 가방에 새콤달콤을 넣고 다닌 건 네가 그걸 좋아하기 때문이다. 단 한 번도 다이어트를 성공한 적 없는 내가 마른 체형이 될 때까지 살을 뺀 건 통통한 사람보다 마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던 네 한마디가 내 귀를 스쳐서였다. 이상형 얘기를 할 때는 네 특징을 나열하는 게 전부였다. 내 모든 행동은 일종의 구애였고, 스킨십이었다.
-있잖아. 이 사람 어때?
-누군데?
-아 이번에 소민이가 나 소개해 준다고 했던 남잔데 어때 보여? 받을까?
-그걸 왜 나한테 말해.
-아니… 아무래도 남자가 보면 어떤 사람일지 좀 보일까 싶어서…
-괜찮네, 받아.
-괜찮아 보여?
-어.
이것 봐, 넌 정말 눈치가 없어. 널 가장 아끼고 소중히 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만 골라서 주는 게 참 미워, 얄미워.
-나 사실 새콤달콤 안 좋아해
-무슨 소리야, 너 나한텐 엄청 좋아한다고 했잖아.
-네가 나랑 친해지기 전에 나한테 새콤달콤 줬잖아.
-응
-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냥 좋아한다고 했어. 근데 너 그때부터 새콤달콤을 꼭 가지고 다니더라? 그래서 신 거 잘 먹지도 못하는데 좋다고 먹었어.
-… 왜?
넌 말없이 계속 걸었다. 어느덧 해는 져가고 있었다. 지칠 줄 모르고 울던 매미는 울음을 멈췄고, 바람에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.
-그 남자 사진 다시 보여줄래?
-응, 여기.
-다시 보니까 별로야. 남자는 남자가 봐야 알 수 있어. 성격도 엄청 못돼 보여, 맘고생만 시킬 거야. 안 받으면 안 돼?
-푸핫.. 새콤달콤 가지고 있어?
-응.
-근데 있잖아. 계속 먹다 보니까 새콤달콤도 좋아진 거 있지? 포도 맛을 먹으면서 은연중에 맛있다고 하면 계속 포도 맛만 가져다주고, ‘레모네이드 맛이 새로 나왔네?’ 하면서 혼자 중얼거리면 다음 날은 레모네이드 맛으로 바뀌고, 근데 생각해 보니까 항상 넌 그랬더라. 지금도 봐, 걷다가 힘들어서 작은 한숨을 뱉은 걸 보고 조용히 걸음을 늦추고 있잖아.
저녁과 밤의 경계를 가르는 따스한 여름 바람을 맞으며 다시 걸었다.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지만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운 마음이었다. 폭죽 소리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의 소리가 혹여 네 귀까지 닿을까 걱정됐다. 아무 말없이 계속 걷던 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.
-소개는 안 받는다고 했어.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.